[하루] 2018.06.14.

아무래도 짐을 부쳐야겠다.

사실 여기 와서 뭘 많이 사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올 때부터 23kg쯤 되는 가방을 들고 왔다. 돌아가는 길은 늘 그렇듯 양 손이 더 무거운 법.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지면, 고생이 극대화된다. 고로, 오늘은 우체국에 들러 가격을 알아봤고, 5kg짜리 국제 소포 박스 하나가 46유로라는 것을 확인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왔다. 오면서 참 여러모로 합리화를 했다. 내가 고생하는 비용보다 낫지, 지구를 위해 내가 여기에 버리고 가는 것보다 낫잖아? 등등. 문득 그 돈이면 내가 좋아하는 뭐뭐뭐를 사거나 먹거나 할 수 있을텐데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

그러다 집에 와서 검색을 해 보니, 6kg까지 33유로에 부칠 수 있는 한인택배가 있다고 한다! 얼마 차이 안 나는 것 같아보이지만, 이정도면 많이 나는 것이다. 마침 매장도 집 옆이다. 무게 나가는 것들(어차피 안 볼 거면서 들고 온 책들도 짐이 됐다)을 꾸려서 내일 아침 9시부터 부지런히 들러봐야겠다. 뭔가 은근히 고민되던 것들이 하나씩 해결되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내일부턴 대학 동기가 독일에서 이쪽으로 건너온다. 사실 온전히 홀로 파리를 즐기는 시간은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일요일 저녁에는 고모 가족들과 식사 약속이 잡혀있다) 이 날을 어찌 보낼까 고민을 좀 했다. 오르세 야간 개장(목요일엔 9유로에 들어갈 수 있다)을 갈까, 어디 펍에서 러시아 월드컵을 감상할까, 다시 라파예트 백화점에 도전해 볼까 하다가 그저 발이 가는 대로 옮겼다. 아, 사실은 위장과 전두엽이 반응하는 곳으로 먼저 갔다.

몽파르나스 타워 인근, 파스퇴르 지역에 있는 한 작은 프랑스 식당에 갔다. 전날 구글맵으로 미리 찾아본 곳인데, 일단 한국인의 평이 없었다. (개인적으로 한국인의 평이 있는 곳은 잘 안 간다. 한국인이 너무 많이 와서….) 점심 식사를 전식+본식 또는 본식+후식 해서 24유로에 파는 곳이다. 주말에는 문을 닫는다. 전식으로는 렌탈콩 샐러드 위에 얹은 새우요리를 먹었고, 본식으로는 흰살 생선이 들어간 바삭한 타코롤 같은 것을 먹었다.

정말 훌륭했다. 새우는 아주 따뜻하면서도 육즙이 살아있는데다 신선하고 쫄깃했다. 렌탈콩은 적당히 새콤하고 짭짤했다. 흰살생선 롤은 정말 바삭하고, 생선이 아주 좋았다. 그 안에 들어있는 채소들도 조화로웠다. 한국에 가서 한 번 해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근과 호박, 그리고 향이 강한 허브를 오래 데워주고, 이걸 밀가루로 만든 판판한 반죽에 펴 바른 뒤, 버터도 살짝 발라주고, 흰살 생선을 얹어 말아주면 될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시크릿 소스가 들어갈텐데, 머스타드나 레몬이면 충분할 것 같다.

우연히 발견한 한 만화가의 전시장인데, 아주 마음에 들어서 포스터 한 장을 사 왔다.

여기에서 조금만 가면 부르델(Bourdelle) 미술관이 있다. 이 양반이 누구냐면, 로댕과 같은 시대를 산 조각가다. 그렇다고 비운의 조각가라는 뜻이 아니다. 둘은 절친이었고, 사제지간이었다. 부르델이 로댕의 조수로 일을 했는데, 로댕이 꽤 키워준 모양인지, 아님 여유를 준 모양인지, 자신의 아틀리에까지 만들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대신 그의 조각은 뭔가 전략적으로 입지를 달리 한 느낌이랄까. 로댕이 주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조각했다면, 부르델은 그리스로마신화의 인물들을 다소 많이 했다. (로댕이 죽은 뒤로는 살아있는 사람도 많이 한 것 같긴 하다. 예를 들어 작가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초상을 이렇게 완벽하게 한 작품은 처음이라며 매우 만족해하며 조각 뒤편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그래선지 선이 아주 둥글고, 부드러운 편이다. 로댕 영향권에 있었으면서도 까미유 끌로델이 다르고, 부르델이 다르다.

아나톨 프랑스 본인이 아주 마음에 들어했다는 본인의 조각상

부르델의 사부이자 동료였던 로댕 조각상 옆에서. 부르델이 본 로댕과, 로댕 본인이 본 부르델은 꽤 다른 것 같다…

아무튼 이곳 미술관은 심지어 무료 입장이다. 내가 머무른 1시간 45분동안 각기 다른 어린이 무리가 두 팀이나 왔다. 참고로 부르델은 샹젤리제 인근에 있는 떼아트르 드 샹젤리제(샹젤리제 극장) 디자인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댄스, 코미디, 노래,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 한 가지 등 모두 네 가지를 극장 벽에 부조로 떠서 새겨넣었다. 극장에 들어가본 게 5년 전인데, 내부가 참 화려했던 기억만은 확실하다. 그 내부를 바로 부르델이 디자인한 것이다. 에펠탑 앞에 있는 구스타브 에펠의 조각상도 부르델이 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에펠은 에펠탑 뿐 아니라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파리에도 ‘원조’인 미니어처가 있다)을 설계하기도 했다.

또한 이 미술관은 실제 부르델이 머물며(다시말해 120년도 넘은 곳이라는 뜻이다) 직접 작업을 하던 스튜디오이자 살롱이었다. 나무냄새가 물씬 풍기면서, 정말 오래된 건물 느낌이 팍팍 났다. 그의 작업실 너머 방에서는 청동조각상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는 비디오가 나왔다. 돌 같은 재질로 만든 조각에 본을 떠서 물라쥬(틀에 액체화된 금속을 흘려보내 틀을 뜨는 것)를 하는 것인데, 이게 이 한 줄로 설명이 가능할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본을 뜨고, 꺼내서 또 뭔가 바르고, 입히는 작업을 계속 한다. 나중에 진짜 청동을 입히는데, 그 과정도 어마무시하다. 정말 수천 도가 넘을 것 같은 불에서 인간이 계속 일을 해야 한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기계화가 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반쯤 완성한 조각을 아주 섬세하게 다듬어줘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이 하나같이 아주 조심스러워서, 정말 예술품을 복원하는 사람들, 판을 뜨는 사람들 모두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직업적 자부심이 엄청날 거란 생각도 들었고. 그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해야만 할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할테니 말이다.

요즘 여기서도 핫한 북한 코너.ㅎㅎ

진심으로 사고 싶었던 음바페 이야기…

그리고 내가 집으로 사들고 온 책. 생각보다 상당히 재밌다!

미술관에서 나와서는, 몽파르나스 타워 인근을 떠돌았다. 자라 매장에 들어가 살 게 없는 걸 확인하고 나왔다. 이번에 와서 한 번도 안 들어갔던 fnac(전자제품 및 도서 판매점)에도 들어가 마크롱과 브리지트 여사의 이야기를 다룬 작은 책 두 권을 샀다. 책이 가볍고 작고 저렴해서 너무 좋다(여기서는 ‘주머니본’이라고 한다. 내 손보다 조금 큰 책이다. 한권에 7000~9000원 정도 한다). TV가격도 이곳이 유독 저렴한 것 같았다. (유로임에도 불구하고!) 삼성TV(55인치)나 LG 고급TV(65인치)가 200만원도 안 한다. H&M에 들어가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로 고생하는 나를 위해 얇은 가디건을 샀다. 신랑의 공연용 티셔츠도 두 벌 샀다. 이곳의 앱을 깔자, 10% ‘웰컴’ 할인 쿠폰이 나왔다. 이곳의 팁 중 하나가 이거다. 정확한 주소까지는 필요도 없고, 파리의 번짓수만 있으면(예를 들어 나는 7구라 75007이다) 웬만한 상점의 회원 가입이 가능하다. 르 봉 마르쉐도 그렇고, H&M도 그렇고. 이걸 가지고 할인 쿠폰을 다운받거나 포인트를 쌓을 수도 있다.

Poilâne 이라는, 이곳의 유명하다는 빵집도 근방이라 찾아갔다. Pain traditionel을 사 가지고 나오는데 이토록 불친절한 곳은 처음이었다. 위키피디아를 읽어보니, 이 빵집 주인이 꽤 상업적인 성공을 한 사람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다만, 이정도의 빵은, 오히려 같은 값에 르봉마르쉐 파티셰리 코너가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에릭 케제르의 이틀 지난 빵이라거나. 그런 의미에서 르봉마르쉐도 갔는데, 와인 두 병을 결제할 때 계산대에 한국인 직원분이 계셨다. 내 신용카드를 보고 알아봐 주셨다. 이것저것 좀 더 물어볼걸 그랬나 싶었지만, 귀찮게 해드리긴 싫어서 잘 사서 나왔다. (나는 내 선택을 믿는다!)

이 길의 끝까지 가면 내 원래 목적지인 소르본느 앞 Cafe le Sorbon이 나온다. 그런데 이미 짐도 많고, 발도 아프고(사실 며칠째 왼쪽 발이 계속 안 좋다. 지난번 발톱 부상 이후로 계속.) 해서 구글 맵을 켰더니, 바로 근방에 시앙스포(SciencePo)가 있다. 명품 가게가 빼곡한 작은 골목을 지나자 시앙스포가 나왔다. 학교 본관 건너편에는 빨간 글자로 시앙스포 서점과 도서관이 있었는데, 서점 안에는 이 학교의 굿즈도 작게나마 팔고 있었다! (안 예뻐서 안 사왔다)

이곳은 프랑스 최고의 인문과학 그랑제꼴 EHESS

그리고 정치학의 최고봉, 시앙스포.

십일 년 전에, 내가 교환학생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그 당시에, 사실 내가 가장 가고 싶던 학교는 시앙스포였다. (연세대와 시앙스포는 교환학생 제도가 마련돼 있었고, 현재도 건재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유독, 내가 교환학생을 갈 시기에는 시앙스포에 자리가 나질 않았다. (내 뒤로는 좀 난 걸로 알고 있다) 그래서 결국 T.O.가 난 HEC로 가게 됐다. 만약에 내가 HEC가 아닌 시앙스포에 왔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HEC는 내가 기대하던 학교도 아니었고, 내가 하던 공부도 아닌데다가, 관심있는 분야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 많이 방황을 했었다. 시앙스포였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까지 파리에서 살고 있었거나, 혹은 한국에서 정치에 (어줍잖게) 발을 담갔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HEC때와 똑같이, 아등바등 살다가 어서 한국에 가서 기자를 해야겠다고 생각해 서둘러 귀국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이래저래 아쉬운 마음에 시앙스포 근처 작은 카페에 들어가 해피아워 맥주를 마셨다. 1664가 오늘은 그다지 맛이 없었다. 이제 진짜 떠날 때가 됐나보다. TV에서는 때마침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을 하고 있었다. 조금 보다가, 한국 축구만큼이나 재미가 없어서 그냥 나왔다. 집에 와서 보니 러시아가 사우디를 5대 0으로 눌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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