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018.06.18.

대만 타이페이 공항까지 도착하려면 아직 8시간 정도 더 가야한다. 에바항공은 유독 자리를 바꿔달라는 부탁을 잘 들어주는 모양인지, 나 또한 결국 자리를 한 번 바꾸어 주고야 말았다. 사실 전에 앉았던 자리는 조금 덥고, 뒷사람이 좌석을 발로 많이 차서 은근히 불편했는데, 나로선 차분하게 작업할 공간을 찾은 셈이니 괜찮다. 기내식도 한국에서 올 때보다 훨씬 낫다. 해산물 특별식을 시켰더니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나오기도 한다. 자리가 안쪽이라 화장실에 자주 가기 힘들어 음료 주문을 충분히 못 하는 것은 좀 아쉽다.

10년 전 한국에 돌아가는 길은 눈물이 났었다.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다. 사실 캐리어가 6kg이나 오버되는 바람에 핸드캐리로 짐을 잔뜩 빼야 했고, 그렇게 카운터를 오락가락 세 번이나 했는데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잘 웃고, 즐겁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나의 지난 한 달 파리 생활이 나름대로 만족스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 집도 가족도 그립기도 하고 말이다. 음, 어쩌면 어젯밤에 와인을 그렇게 마시고도 기껏 3시간 밖에 자지 못해서 조금 떠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언니가 사준 les bleus 옷을 입고 한국까지 왔다. 코 밑엔 며칠 된 뾰루지.

소감을 말하자면 나는 정말로 잘 왔었다. 아주 잘 살고 간다. 눈 감고도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있던 곳을 자세하게 묘사할 수 있을만큼 많이 다녔다. 우리나라로 치면 7층인 원형 계단을 올라 왼쪽 두 번째 방. 문을 열면 창 밖으로 키 큰 나무의 정수리만 보이는 곳. 창문을 열면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근처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소파베드 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책상 의자를 붙인 채 달그락 거리는 소리는 내가며, 딱딱한 곳에 발 뒤꿈치를 붙이고 새우잠을 잤다. 파리의 오뉴월은 참 춥고 참 뜨거워서, 창문을 닫고도 이불을 덮는 날이 있었고, 창문을 열고 모기에게 뜯기는 날도 있었다. 방의 전구는 나갔고, 몇 개 안 남은 불빛에 의지하며 신문을 읽고, 기록 작업을 했다. 눈이 조금 나빠진 것 같다.

지난 한 달에 대해 통계를 내 보자면,

– 모두 29일치의 신문을 구입하거나 구해서 봤다.

– 정확히 2권의 신문 스크랩북을 완성했다. 노트 마지막 장까지 다 썼다.

– 11곳의 미술관에 갔다. 작은 갤러리들은 너무 많이 가서 수를 따지기가 어렵다.

– 2번의 공연을 갔다. 피아노 리사이틀과 대만 현대무용이었다.

– 1번의 대형 컨퍼런스에 갔다. (VIVATECH)

– 1번의 대형 스포츠 행사 직관을 갔다. (Roland Garros)

– 각기 다른 6 그룹(또는 개인)의 지인을 만나 시간을 보냈다.

– 모두 6점의 책을 샀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은 1,2권으로 돼 있지만 여기선 한 점으로 친다. 잡지는 제외.) 두 점은 영어책, 네 점은 불어 원서다.

– 방에서 한 달 동안 9병의 와인을 먹었다. 그중 절반은 하프보틀, 절반은 750ml다.

– 11곳의 불랑제리에서 빵을 먹어봤다.

– 가장 많이 걸은 날은 6월 15일 금요일이다. Fitbit 측정치로 2만5,582보 걸었다.

– 하루 평균 11577보를 걸었다. (아이폰 도보수와 fitbit 측정치 중 큰 값들에 대해 평균)

– 표준편차는 아이폰이 더 작다. 아무래도 핏빗은 차는 날도 있고 가끔 충전하느라 놓고 갈 때도 있으니.

– Fitbit으로 측정된 20일에 대해, 하루 평균 406.3분, 즉 6시간 46분을 잤다.

– 가장 자주 산 식료품(물, 와인 제외)은 마늘이다.

– 제일 맛있었던 물은 Mont Roucous다. Languedoc 지역 물이라고 한다.

– 여섯 종의 치즈를 사 먹었다.

– 한 번의 감기와 한 번의 발톱부상을 겪었다.

– 시내 교통비로 44.7유로를 썼다(공항왕복 제외). 꺄르네(10장권)를 세 번 끊어서 남은 표는 동생 주고 왔다.

– 신발 두 켤레를 버리고 왔다. 닳아버려서.

– 살은 ?kg 찐 것으로 추정된다. 체중계가 없어서 전혀 알 수가 없다만 찐 것은 확실하다. (얼굴이 동그래졌다!)

– 집에 돌아가는 길 캐리어 무게는 36.4kg이다. 열심히 기내용 짐으로 덜어냈다.

이정도면 꽤 바람직하게 살다 가는 것 같다. 내가봐도 참 부지런하다. 어제 고모부 말씀대로 신랑과 같이 오거나, 혹은 신랑이 나 있는 동안 잠깐이라도 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 또 올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오게 될 것 같다. 마음같아선 박사과정 중에 이쪽으로 비지팅 스칼라나 혹은 박사후과정을 여기서 해도 좋을 것 같은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여행은 지나가고 나면 사실 많이 잊혀지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꽤 기억이 많이 남을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기록을 거의 매일같이 열심히 했다. 나는 이 한 달을 나에게 투자했다. 하루하루를 값지게 사는 법을 다시금 익혔다. 집에 가면 바게트도 직접 굽고, 끼쉬도 해 먹고, 신선한 야채를 넣은 부리또도 해 먹을 것이다. Bien d’être, 즉 ‘잘 사는 것’이 이 곳에서도 화두다. 미국과 좀 톤은 다르지만, 유기농 음식을 챙겨먹고, 비싼 것보다는 좋은 것을 따지며, 나의 행복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삶을 배워간다. 일과 삶의 밸런스를 맞추어가는,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

파리는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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