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해 볼까? 고민하는 직장인에게 <1>

이 연재는 ‘회사를 때려치고 공부나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시작됐다. 필자가 지난 1년 동안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거쳐온 과정을 차근차근 기록했다. (아직 1년 더 남았다) 필자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린 나이(만 22세)에 덜컥 기자가 됐고, 1년 반쯤 일하다 2년쯤 놀고(알바로 작가일도 했다), 그러다 또 4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15년 가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기본 품성은 1)궁금한 게 많으며 2)해결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고 3)재미없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4)성격이 더럽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필자의 학부시절 전공은 어문학이었고, 석사과정 전공은 공학이다. 한참 회삿일에 재미를 붙이던 2014년 말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1> 들어가긴 쉬워도 적응하긴 꽤 힘들 걸? – 공부편 1 –

기자로 일한다는 것에는 굉장히 큰 메리트가 있다. 궁금한 게 생기면 그 분야 전문가에게 무작정 전화해 “OO일보 OOO입니다”라며 답을 구할 수 있고, 출입처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분야를 접하기도 좋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어지간해선 만날 수 있고, 들어가보고 싶은 현장도 웬만해선 가볼 수 있다.

필자가 ‘확 때려치고 공부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를 이야기하려면, 무려 2년 전인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 해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기자가 그렇듯 ‘세월호’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던 해였다. 2008년부터 기자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대한민국의 ‘다이내믹’한 천태만상을 모두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앞에서는 무력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해 사회부 기자들은 꽤 많이 성장했고, 생각이라는 것을 더 하게 됐으며, ‘다음’을 생각하게 됐다. 필자의 경우, 그 해에 편집국 사회부에 몸 담았는데, 주말판 담당이라 모든 사건을 심층 취재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었다. 엄청나게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파고들어야 했다. 매 주말마다 ‘아이를 낳는’ 심정으로 토요일밤을 보냈고, 일요일 아침 집 앞에 도착한 신문 뭉치를 펼쳐보며 혹시 오타는 없는지 몹시 조마조마해 했다.

그러던 2014년 여름 어느날,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데이터 저널리즘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고, 열 살 때 배우던 GW-베이직, Q-베이직 같은 코드를 추억하기에 이른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그즈음 내게는 개발자인 친구들이 생겨났고, 코드를 가르치는 소규모 스터디에 가입할 기회도 생겼다. 처음 배운 언어가 루비(RUBY)였는데, 코드카데미(Codecademy)의 예제를 따라하다 암에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놔 버렸다. 허나 이미 사내에 “저 친구 요즘 컴퓨터 배운다”는 소문이 났고, 억지로 ‘손코딩’을 해가며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다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니 주말에 나오는 기사 몇 바닥이 다 ‘내 새끼’같을 수밖에. 그러다 2015년, 방송 부문으로 발령이 났고, 워낙 바쁜 일상 속에서 내 것을 쌓지 못한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다 쓴 치약’처럼 손톱 끝으로 내 모든 걸 꾹꾹 밀어내는 느낌이랄까. 그 때쯤 나는 ‘퇴임을 한 선배들은 무슨 일을 하나’를 알아보고 다녔고, 6개월의 취재 끝에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때려친 이유’다.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일은 몹시 재밌었지만, 옮겨 간 부서에서는 그 전에 느끼던 희열을 유지할 수 없었다.
  2. 때마침 ‘미래의 먹거리’로 보이는 학문에 관심을 느끼게 됐고, 실제로 배워봤다. 고통도 느껴봤고, 견딜 만 했다.
  3. 이 직업은, 퇴직 하고 나면 주로 기업 홍보실에 가는구나- 라는 걸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홍보 업무가 딱히 끌리지 않았다.
  4. 가족들의 지지도 있었다. 물론 2년치 생활할 만한 돈도. (그때는…)

이 정도의 근거라면 충분히 다음 스텝을 향해 나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상황도 괜찮았다. 당시 나는 결혼 2년 차. 신랑은 지금도 회사를 관둘 생각이 전혀 없는 (아주 착한)사람이다. 주변의 한 친구는 “나는 아직 결혼을 못 해서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했다. 선 시장에 나갈 때 ‘여기자’라는 직업은 그리 나쁘지 만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나는 모아둔 돈도 몇 천 만원 있었다. (돈 얘기는 아마 다음회쯤에서 털어놓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눈물이…) 무엇보다도 ‘궁금한 그 일, 그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영리하게 선택해라, 리스크도 줄어든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것은, 1년 전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쉬웠다. 개인적으로는 학부 졸업 후 석사 진학보다, 학부 졸업 후 취업 후 석사 진학이 보다 쉬운 것 같다. (첨언하자면, 물론 요즘 같은 취업난에 학부 졸업 후 사회 진출 자체가 어려운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 글은 현재 회사 생활을 하는 이들을 타깃으로 하므로, 상대적인 난이도를 논하기 위해 위와 같이 서술했다.) 선발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학부 졸업생과 사회생활을 한 사람을 같은 선상에서 두고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사회생활을 한 사람은 ‘한 번 필터링이 된’ 인재들이다. 설령 그가 학부시절 전혀 다른 공부를 했고, 직장 생활 또한 희망 전공과 다른 일을 했을 지라도 선발을 맡은 교수들 입장에선 한 번이라도 서류를 더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생활을 한 사람은 같은 조건의 또 다른 사람이 그의 경쟁자가 되는 셈이다.

필자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전혀 다른 전공 베이스의 전혀 다른 일을 하던’ 케이스다. 어떻게 보면 타깃을 꽤 영리하게 선택하기도 했다. 일단 내 배경으로 공과대학에 진학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뻔하게 언론정보학과에 진학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해보지 않았고, 그러느니 그냥 일을 계속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침 대한민국에서는 융합 학문의 바람이 솔솔 불고 있었고, 서울대를 비롯해 유수의 대학에서 융합 관련 학과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필자 입장에선 무조건 ‘융합’을 잡아야 했다.

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Y대나 대전 K대의 경우 학비가 몹시 비쌌다. 그나마 대전 K대는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으나, “이 곳에 가면 인문학 베이스는 엄청나게 무시를 당한다”는 뜬금없는 소문을 접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대에서는 ‘수학 못 하는 문과 출신’에 대한 편견이 어딜 가나 있기 때문에 어느 학교나 다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S대였다.

학부에서 스트레이트로 진학하는 케이스와는 달리 내 경우 연구실 인턴이나 교수님 컨택(Contact) 같은 가장 중요한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만큼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인데, 기자로 일하긴 했어도 온전히 IT업계만 담당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분야 전문가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이 닿진 않았다. 필자의 지도교수와도 면접 당일에 처음 대면 했을 정도다. 물론 컨택은 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일단 나에게 정말 맞는 연구실인지 알 수 있다.
  2. 교수와의 면담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연구가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좁혀 갈 수 있다. 
  3. 장학금, 인건비 등 정보를 얻을 수 있다.
  4. 무엇보다도 합격할 확률이 높다.

영어 공부좀 해라, 안 그럼 세게 덴다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영어점수다. 해외든 국내든 영어 점수는 필수다. 만만하게 봤다간 정말 큰 코 다칠 수 있는데, 필자의 경우 조기 영어교육을 꽤 촘촘히 받은 전력도 있고 해서 ‘뭐 별 일 있겠느냐’는 마음으로 덤벼 들었다가 아주 세게 델 뻔 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영어 시험을 본 것이 2009년 부근의 토익(TOEIC)이었다. 2015년 3월에 텝스(TEPS)를 신청했는데, 그 전에 같은 시험을 본 것이 아마 2006년 쯤이었을 것이다. 일을 하던 중이었으니 당연히 시험 공부는 전혀 하지도 못 했고, 시험장에 들어가서야 ‘어휘와 문법, 듣기와 독해 시간이 모두 분리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척 어렵다는 것도 깨우쳤다. 하필이면 그 시험이 원서 접수 전 마지막이어서, 점수 나오는 날까지 상당히 조마조마 했더랬다. 다행히 커트라인을 살짝 넘긴, 인생 최악의 점수표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점수는 숫자일 뿐, 실제 실력과는 무방하다는 생각이 계속됐다. 면접장에서 “어학 전공인데, 왜 영어 성적이 이 모양이죠?”라는 말을 들었을 때 “텝스가 정말 어렵더라고요”라며 웃을 수 있던 것도 그 때 뿐. 합격 후 첫 면담 자리에서 지도교수가 “영어 라이팅은 어느 정도 하나요?”라는 말에 “그럭저럭”이라고 말 할 수 있던 것도 어쩌면 그 때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영어에 대한 나의 이 무모한 생각(그리고 착각)이 어떻게 깨지게 되었는 지는 뒤에서 다시 이어가겠다. 

일은 7월 초에 그만 뒀다. 휴가 까지 탈탈 털어 쓴 뒤 기자 생활을 만 5년 꽉 채운 날로 계산해 고른 날짜였다. 플랜B로 나중에 다시 일을 해야할 경우에 대비, 이직 가능 연한은 채워놨다. 지도교수를 만난 것이 7월 말이었고, 그는 “HCI분야에서 가장 큰 학회가 카이(CHI)다. 여기랑 WWW 학회 사이트에 들어가서 논문 다운받아 읽어보라”고 했다. 필자는 마냥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고 싶었을 뿐, 그 분야나 세부 전공에 대한 이해는 몹시 부족했다. 다만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굳이 그 분야를 일백프로 알고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이 완성돼가는 과정은 어차피 겪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1을 말하면 교수는 10을 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몇 개의 단어 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다.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한 달 동안 두 학회(CHI, WWW)의 2014년 논문(Proceedings) 요지문(abstract)을 모두 읽고 그 가운데 20개를 뽑아 본문을 모두 세세하게 읽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이런 논문은 모두 유료다. 다만 학교에서 다운받아 볼 경우 라이센스 등록이 돼 있어 무료로 볼 수 있다. 마침 집이 학부 시절을 보낸 학교와 가까이 있어, 졸업생 자격으로 학교 도서관에 가서 논문을 받아 읽었다. 졸업 후 7년 만에 모교 도서관에 간 셈이었다. 정리는 내 방식대로 간단하게 했는데, 이게 추후 내 선행연구(reference) 정리 작업에 꽤 많은 도움이 됐다. 한 페이지 분량으로 요약문, 여기에서 읽고 떠오른 연구 주제(발제),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해 써 내려갔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있었다. 논문은 모두 영어로 써 있다. 더구나 인문학을 하던 사람에게 낯선 용어도 한 둘이 아니었다. 아니, 일단 대학원에서 쓰는 용어가 모두 생소하다. 교수님과 면담을 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가 쓰는 영어 용어들을 알아 듣기가 그리 수월하지 만은 않았다. 그간 기자로서 많은 교수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지만, 그들은 늘 쉬운 용어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줬다. 자신의 학생이 아닌, ‘잘 모르는’ 기자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쪽 ‘업계’에 들어온 이상 이 분야 용어에 빠르게 익숙해져야 했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모든 말을 쉽게 풀어 써 준 외신 뉴스와 달리, 논문은 자신들의 논리를 꼭 단순하고 명료하게 풀어나가지 만은 않는다. 그걸 ‘못 쓴 논문’이라고 폄훼할 수만은 없다. 모든 글은 친절하지 않다. 그냥 죽어라고 읽고, 파는 수 밖에 없다. 후에 또 언급하겠지만, 내가 직접 논문을 쓰는 순간이 왔을 때 ‘그 글들 만큼’이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영어로 읽는 것이 조금 편해진 것은 6개월 파고 들었을 무렵이었다. 그나마도 스크린에 띄우고 보는 것은 알파벳이 영 헷갈려서, 모두 인쇄해 밑줄을 그어가며 종이째 읽어야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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