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나 해 볼까? 고민하는 직장인에게 <3>

3편에서는 잠시 생활 얘기좀 해보겠다.

<3>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난한 얘기 – 생활편 1 –

대학원생의 수입은 두 가지로 나뉜다. 장학금과 프로젝트 인건비. 아, 여기에 파트타임 잡(과외 등 알바)을 뛰는 경우까지 포함하면 세 가지 일 수도. 물론 이 내용은 공학계열과 일부 사회계열 만의 이야기일 수 있다. 랩(Laboratory)이라는 연구실 체제가 아니면 온전히 자기 돈을 모두 내고 과정을 끝마치는 경우도 많다. 장학금은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지급하는 성적우수 장학금이나 근로장학금, BK21(브레인코리아 21 사업단) 장학금 등이 있다. 

프로젝트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따내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입학 당시 ‘보릿고개를 난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서, 1년이 넘은 이제야 작은 프로젝트에 하나 들어가 있다. 대개 대학 연구실은 산학협력(R&D라고도 쓰인다)을 통해 들어오는 과제를 따서 그로부터 연구비(인건비)를 얻어낸다. 과제는 주관이 누구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정부 과제, 또는 기업 과제다. 정부 과제는 산업자원통상부나 미래창조과학부 등 부처나 산하기관에서 수시로 낸다. 물론 가을쯤 대부분 어떤 과제를 낼 것인지 1년치 계획을 세워서, 그에 맞춰 R&D 예산을 짠 뒤 연초에 대략적인 개요를 발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후 수시로 추가 공고를 낸다. 여기서부터는 정보 싸움인데, 어느 과제가 언제 떨어질지, 또 혹시 암암리에 내정자가 있는 것은 아닌지, 컨소시움을 꾸리는 것이 나은지 등을 미리 알고 들어가면 과제를 선점하는 데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물론 이건 교수의 몫이다, 제안서는 대부분 박사과정이 쓰지만.

다만 이 정부 과제라는 것이 수요는 많은데 공급은 적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에 같은 학문을 하는 연구실이 수 십 개는 될 것 아닌가. (당장 컴퓨터공학과만 검색해도 몇 백 개는 나온다.) 정부 과제는 대개 수억원 단위로 진행돼 규모가 은근하고, 또 한 번 선점하면 그 연구실의 명성에도 ‘어찌됐든’ 득이 된다. 추후 제안서를 써서 낼 때 ‘어떤 부처 무슨 연구에 참여했다’는 한 줄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정부라는 곳이 원래 사람이 돌고 돌기 때문에, 한 과제를 하며 만난 부처 인물이 다른 과제를 따낼 때즈음 그 자리에 또 가있을 수도 있는 법이다. 인맥으로 프로젝트가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이 모든 것이 정보력 싸움이기 때문에 조금 더 나은 제안서를 쓰는 데 도움이 안 될 리 없다.

기업 과제는 인맥에 의한 것이 상당히 많다고 들었다. 그리고 보다 더 꼼꼼하다고 했다. 주변에서 기업 과제를 수행하는 연구원들을 보면, 가끔 ‘용역이 아닌가’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들이 주문한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거기에 대해 인건비를 받는 형식이다. 추가 주문도 많고, 인건비가 늦게 들어오는 일도 왕왕 있다. 프로젝트를 하기로 한 기업의 해당 부서가 갑자기 인사 조치로 완전히 해산되는 바람에 계약이 깨지는 경우도 있다. 다만 연구원 입장에서는 추후 사회 진출시 득을 보는 부분도 없지 않을 것이다.

씀씀이는 쉬이 달라지지 않는다

여차저차해서 연구실에 프로젝트도 들어오고 장학금도 풍족해졌다고 치자. 그 경우에도 학생마다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은 꽤 차이가 크다. 상한선이 있다. 박사과정의 경우 월 이백여 만 원 선, 석사과정의 경우 백여 만 원까지 받을 수 있다. 일을 하다 들어온 사람 입장에서는 갑자기 수입이 확 줄어드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여기서부터 진짜 생활 이야기. 평소에는 비교적 대수롭지 않게 택시를 타고 다니고, 출장을 가면 법인카드로 결제하고, 아침마다 스타벅스 커피를 벤티 사이즈로 들고 하이힐로 뛰어 다니던 30대 여성 회사원이 갑자기 월 백 만원을 받으며(심지어 그조차도 받지 못하며) 가장 편한 옷에 몸을 구겨 넣고 연구실에 박혀 있다고 생각해보라. 정말 갑작스럽게 수많은 것들이 변한다. 특히 돈 문제가 가장 크다. 벌이는 줄어도 씀씀이는 쉬이 달라지지 않는다. 필자의 경우 그래도 몇 천 만원 모아서 퇴사했다. 새 인생 시작이라며 신이 나서 차도 바꾸고(이게 좀 크긴 했다) 신랑 양복도 몇 벌 맞추고 등록금도 내고 어쩌고 하다보니 일 년 만에 현금통장이 바닥을 드러냈다. (다행히 적금 통장은 아직은 건재하다만) 도대체 뭘 그렇게 썼나 싶지만, 큼직한 거 몇 개 뺀다고 빈털털이가 될 정도는 아니다. 말인즉슨,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평소처럼 쓰다보니 월 백 몇 만원씩 쓱 빠져나간 것이 지금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이다. 지출은 계획적으로 해야한다, 바이블같은 말이지만.

어쩌면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도 느낄 수 있다. 입학 이후 옷차림도 확 바뀌었다. 주변 동생들(하지만 나보다 먼저 입학한 대학원 선배들)은 “누나가 추리닝(트레이닝복)을 언제부터 입을 지 우리가 내기 했다” “쓰레빠(슬리퍼)는 생각보다 늦게 신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았다. 아침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줄창 앉아서 공부를 하려면 1)배를 압박하지 않고(소화가 안 된다) 2)신발은 벗기 편하며(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여야 한다) 3)후드점퍼(에어컨을 틀든 히터를 틀든 필요하다)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 편한 옷차림에 익숙해지면 친구들을 만날 때 무슨 옷을 입어야 할 지 고민에 빠진다. 그러고보니 옷이라는 것을 산 지도 몇 개월이 넘은 것 같다.

참고로 대학원에 와서도 놀랐던 것은- 우리 전공 뿐 아니라 다른 단과대 수업을 들어봐도 그렇다만- 정말 잘 사는 집 아이들이 많다. 시절이 지날수록 잘 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 하는 구조라고들 하지만, 그보다는 있는 집일 수록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상황이 더욱 가속화되는 분위기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적어도 대학이라는 곳에 7년쯤 간격을 두고 들어온 사람으로서 이같은 현상은 더 잘 보인다. 대학원생들의 씀씀이도, 생각보다 꽤 크다. 물론 다들 돈 쓰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여유가 있다. 대신 낸 맥줏값 5천원을 어떻게 받아낼까 고민하며 밤잠 설치던 스물 한 살 내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상황에서 잠이 오냐

위에서 잠시 시간 이야기를 했는데, 대학원생의 하루는 직장인의 하루와 정말, 정말정말정말 다르다. 아무리 불규칙한 생활의 밤낮없는 기자생활이라고 해도 아침에 출근해서 밤에 퇴근은 했다. 대학원 교수님 가운데는 ‘일만시간의 법칙’을 강조하며 “지금부터 2년 동안 1만 시간 채우려면 매일 4시간 자야 한다”는 조언까지 한 분도 있다. 이만하면 워커홀릭이 아닌 스터디홀릭이라 할 수 있다. 공부는 정말 한 만큼 는다. 집중을 얼마만큼 했느냐가 아주 정직하게 드러나는 작업이다. 필자의 경우, 입학 후 6개월 뒤 신혼집을 신랑 직장이 있는 지방으로 옮겼다. 학교에서 멀어졌고, 따라서 기숙사에도 머물게 됐다.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있을 때 열심히 하자.’ 그래서 일주일에 서너 번 학교에 오더라도, 무조건 밤 12시는 넘기고 기숙사 방에 들어갔다. 평균적으로 새벽 두시 반쯤에야 비로소 잠이 들었다.  게다가 방의 풍수가 좋지 않은 탓인지 환경이 바뀌어선지, 기숙사에서 자는 날은 늘 오전 7시면 깼다. 너댓시간 자고 연구하고 집에 가고, 이걸 근 6개월 째 반복하고 있다. 대학원은 자율성이 보장되지만, 한 만큼의 성과가 나온다. “이 상황에서 잠이 오냐” 새벽에 절로 눈이 뜨이는 바로 그 순간,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다. 과장 아니다. 슬프게도 진짜다. 

공부나 해 볼까? 고민하는 직장인에게 <2>

입학 직후 이야기부터 풀어 본다.

<2> 들어가긴 쉬워도 적응하긴 꽤 힘들 걸? – 공부편 2 –

필자는 원래부터 시험을 잘 보는 편은 아니었다. 눈치가 빠르고 배짱이 두둑해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같은 큼직한 시험에선 성적이 좋았지만, 내신 성적이며 대학 학점이며 뭐 하나 나은 게 없었다. 기자는, 필자 입사때까지만 해도 학점이 안 좋을 수록 높이 쳐줬다. (딴 짓을 많이 해야 보고 듣고 배운 것도 많을 거라는 지레짐작때문일지도…) 만일 대학원 입시를 회사 생활 거치지 않고 바로 시도했다면, 틀림없이 낙방 했을 수준이다.

대학원에 들어오니 근 8년 만에 시험이라는 것을 보게 됐다. 3학년 2학기와 4학년 1학기를 통으로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이랍시고) 노닐다가, 4학년 2학기던 2008년 가을에 입사를 하는 바람에 내 인생 학부 마지막 시험은 3학년 1학기 기말고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입학 이후 보는 시험이 무려 8년 만일 수 밖에. 처음 들은 강의가 통계와 컴퓨터 언어학이었는데, 공학계산기라는 것도 태어나서 처음 써 봤다. 낯설기 짝이 없는 수식을 통으로 외우고, 온갖 법칙(SVM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암기하려니 머리 속이 빙빙 돌았다. 이해를 하고, 써 내려가는 것에는 아주 능력이 뛰어났지만, 수식이라는 것들은 증명을 수 차례 해 봐도 뒤 돌아 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더구나 교수님이 “이건 다 알지?”라며 증명을 뛰어넘고 PPT의 하얀 바탕에 두둥실 띄운 공식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헛웃음이 났다.

고등학생 참고서가 가장 쉽다

수학계의 저주받은 05학번이라는 말이 있다. 2002년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필자는 7차 교육과정의 첫 세대가 됐다. 수능이 대거 바뀌었다. 인문계로 갈 학생은 과학 과목 시험을 아예 보지 않아도 됐고, 더불어 수학에서는 무려 ‘미분과 적분’을 배우지 않아도 됐다. 2005년, 신입생을 받은 대학들은- 특히 경제학과를 중심으로 “미적분도 못 하는 애들을 어떻게 대학에 보내느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고, 그 이후 세대부터는 다시 고등학교 수학 과목에 미적분이 포함됐다.

미적분도 모르고 30년을 산 필자로선 그것이 뭐 별 거 겠느냐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그리고, 입학을 한 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미적분은 단순히 수학 공식을 쉽게 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를테면 머릿속 알고리즘을 짜는 데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곧장 교보문고로 달려가 EBS 미적분 교재를 고르는데, 종류가 너무 많았다. 남동생의 빛바랜 수학1, 수학2 정석을 꺼내다가 이공계 출신인 남편에게 과외를 받았다. 통계 공식을 일일이 증명해가며 수학의 재미라는 것을 근 십 수년 만에 다시 깨쳤다. 대학교재로 통계를 보다가 골이 아팠고, 마치 과외선생이 된 것 처럼 고교 교재를 뜯어봤다. 기초를 닦아야 그 다음 단계로도 넘어갈 수 있다. 특히 수학은 그렇다. 집에는 여전히 수학의 정석이 꽂혀있다.

코딩은 눈 말고 손으로, 연습하고 또 연습하라

전 편에서도 말했듯, 입학 전에 실제로 코딩을 조금은 공부했었다. 개인적으로 학원을 다니는 것은 어릴 때부터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코딩을 배우기 위해 필자가 가 본 모임은 총 두 곳이다. 첫 번째는 ‘오픈컬리지(opencollege.org)’, 두 번째는 ‘데이터그램(www.facebook.com/groups/datagram). 전자는 일종의 코워킹스페이스 같은 곳인데,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러가서 공간을 쓰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결이 좀 다르다. 자신이 잘 하는 것을 클래스로 열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한 가지를 배워보고, 여럿이 모여 특정 작업을 끝마치는 배움터 같은 곳이다. 필자의 경우 이 곳에서 글쓰기 강의를 열고, 수채를 그려보고, 그리고 코딩을 배웠다. 여기서 배운 것은 1)코드카데미(www.codecademy.com)를 통한 html 전반과 2)같은 인터넷 강의를 통한 ruby 기초다. 물론 ruby의 경우 모두 끝마치진 못했다. 코드카데미는 지금봐도 정말 속 터져나가게 하는 데 뭐 있는 것 같다. 다만 개론적인 것을 학습하기에는 꽤 괜찮은 도구다. 연구실에 들어와서 보니, 이와 같은 컴퓨터를 활용한 교육(MOOC 등등)에 대한 연구가 HCI분야에선 참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더랬다.

후자인 ‘데이터그램’은 고백컨대 딱 두 번 갔다. 오픈컬리지가 20대~30대 사람들을 주축으로, 좀 더 발랄한 분위기에서 즐기듯이 배우는 기분이었다면, 데이터그램은 30~40대 직장인을 중심으로 하는 꽤 전문적인 스터디다. 어느 공간 하나를 잡아 놓고, 데이터를 활용한 시각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커리큘럼도 체계적으로 짜서, 자신에게 맞는 코스를 골라 수강하는 체계였다.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한 부분을 맡아 발제도 해야 했다. 필자가 두 번 만 간 이유는, 사실 당시로선 그 스터디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였다. 물론 지금와서 다시 간다면 할 만 할 수도 있다만, 지금은 분야가 그리 맞질 않는다. (개인적으로 시각화(visualization)에는 그리 크게 관심이 있진 않다) 무엇보다도 그 스터디에서 누군가 필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떤 데이터를 분석하세요?” 그때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런 질문은 학계에서도 종종 듣는다. “어떤 분야를 공부하세요?” “어떤 연구를 하시죠?” 이것이 바로 뒤에서 언급할 ‘도메인’이라는 것이다.

그에 앞서 코딩에 대해 좀 더 세부적으로 이야기해보자. 필자의 공부 방식은 지난 30년간 ‘눈으로 읽고, 손으로 기록하고, 머리로 떠올리는’ 식이었다. 연필을 굴리든 타자를 치든 그것은 오직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눈 앞에 새로운 아웃풋이 펼쳐지진 않았다. 일단 파이썬 책을 신명나게 읽고 있자니, 교수님이 뒤에 서서 이런 말을 했다. “눈으로 코딩하네요.” 책에서 제공하는 코드를 몇 개 옮겨 쳐 가며 ‘이것 갖고 늘겠는가’ 반신반의하며 며칠을 났다. 손은 생각보다 기억에 용이한 물건이었다. 옆 자리 컴공과 출신 코딩 잘하는 친구도 “적어도 2년은 코딩 해야 저절로 손이 다음 줄을 친다”고 했다. 무조건 쳐 봐야 느는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를 할 것인가. 입학하자마자 첫 학기(3개월) 동안 필자는 정보 시각화를 위해 HTML과 Javascript, CSS를 배워야했다. 통계 수업시간에는 R을 썼고, 컴퓨터 언어학 시간에는 텍스트 분석의 주요 언어로 Python을 썼다. 동시에 수 개의 언어를 터득해야 했다. 골치가 아플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다. 회사에 있었다면, 회사에서 3개월 안에 이 세 가지를 끝내라고 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정답은 늘 예스(Yes)였다. 적어도 d3나 Stack overflow에서 어떤 코드를 베껴다 쓰면 되는지, 그 중에 어떤 변수(parameter)를 바꾸면 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짜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 만들어 보고 싶은 것, 풀어내고 싶은 데이터에 대한 질문을 메모지에 나열해뒀다. 그리고, 이 언어들 가운데 가장 나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웹에서 데이터를 긁어, 그것을 통계적으로 풀어내기에는 R이 나을 수도 있고, 웹용 간단한 익스텐션을 구현하기에는 HTML과 Javascript가 용이했다. 또 라즈베리파이(Raspberry pi)를 활용해 IoT 기기를 만들기에는 Python이 편했다. 모두를 아우르는 것은 Python(파이썬)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대신 1학기 내내 다른 언어에 대해서도 꽤 탄탄하게 기초를 쌓아 두었기 때문에, 추후 R이 필요한 순간에는 거침없이 R스튜디오를 열 수 있었다. (물론 명령어가 생각나지 않아 늘 책을 다시 펼쳐봐야 한다.)

도메인(Domain)은 빠르게 굳힐 수록 좋다

1년은 생각보다 빠르다. 어쩌면 이후 1년이 더 빠르게 지날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필자는 도메인에 대한 고민을 하고 또 한다. 실제 많은 대학원생들이 자신의 세부 주제를 정하지 못해 걱정이 크다. 직장을 관두고 온 당신이라면, 그래도 비교적 도메인을 빠르게 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아닐 수도 있다.

필자의 경우, 저널리즘쪽은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제 입학 후 첫 면담자리에서도 ‘저널리즘은 이제 지겹고, 데이터 분석을 통해 예측이란 걸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지도교수는 묘한 웃음을 지었고, 그 웃음을 1년이 지난 지금은 나름 해석할 수 있다. ‘웃기고 있네’라는 뜻이었다. 인간은 결국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택하게 돼 있다는 법칙 때문이다.

서른 살에 새로운 학문을 하는 것도 모자라, 내 삶을 전혀 거치지 않은 것을 분석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영 쉽지 않은 일이다. 개인적으로 의학이나 지역 정보, 여성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이 갔다. 특히 인지언어쪽에는 학부때부터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관심이 많은 인지언어 조차도 뇌과학이나 고급언어학, 신경학 등 파고들면 들수록 알아야할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단순히 데이터만 모아 결과값을 낸다고 해서 분석을 섣불리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 저곳 건들면 건들수록 필자가 직접 체득한 저널리즘 분야에 가장 자신감이 생겼다. 다만 융합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언론정보학과에서 내는 페이퍼와는 확연히 다른 것을 해야 했다.

도메인이라는 것은 사람의 관심 및 연구 분야를 어느 한 곳에 가두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만 위에서 말했던 것 처럼, 어떤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이느냐는 것에 대해 답을 던질 수 있는 키워드라 할 수 있다. 필자가 공부하는 HCI분야는 인간과 컴퓨터의 인터랙션(Human-Computer Interaction)을 다룬다. 그 가운데에서 도메인을 정하자면 개인적으로 감성컴퓨팅(Affective Computing), 즉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컴퓨터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고, 주요하게 다루는 데이터는 뉴스데이터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필자가 말하는 ‘연구 도메인’이다. 여기에서 나는 더 확장할 수 있다. 뉴스데이터의 감성 분석을 통한 인간의 인지 능력이라거나, 혹은 그 반대를 다룰 수도 있다. 정해진 도메인을 축으로 가지를 쭉쭉 뻗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꽂은 이 기둥이 뿌리를 잘 내릴 수 있으려나’ 싶은 의심은 누구나 든다(고 한다).

특히 박사 과정을 진학하는 자들에게는 이 도메인이 아주 중요하다고들 한다. 특히 몇몇 ‘레퍼런스 결벽증’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저작들이 어느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쓰여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학부때부터 쓴 논문이 하나의 줄기처럼, 어느 특정 키워드를 타고 박사 후 과정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와 같은 생각에 몹시 동의한다. 이것 저것 다 해 보고 써 보는 것도 좋지만, 미세하게나마 자신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논문이 이어져야 추후 자신을 어필하는 데 있어서도 전문영역을 강조하기에 좋다. 몇 개의 키워드로 나의 저작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영예다.

공부나 해 볼까? 고민하는 직장인에게 <1>

이 연재는 ‘회사를 때려치고 공부나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시작됐다. 필자가 지난 1년 동안 대학원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거쳐온 과정을 차근차근 기록했다. (아직 1년 더 남았다) 필자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린 나이(만 22세)에 덜컥 기자가 됐고, 1년 반쯤 일하다 2년쯤 놀고(알바로 작가일도 했다), 그러다 또 4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15년 가을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기본 품성은 1)궁금한 게 많으며 2)해결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고 3)재미없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4)성격이 더럽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필자의 학부시절 전공은 어문학이었고, 석사과정 전공은 공학이다. 한참 회삿일에 재미를 붙이던 2014년 말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1> 들어가긴 쉬워도 적응하긴 꽤 힘들 걸? – 공부편 1 –

기자로 일한다는 것에는 굉장히 큰 메리트가 있다. 궁금한 게 생기면 그 분야 전문가에게 무작정 전화해 “OO일보 OOO입니다”라며 답을 구할 수 있고, 출입처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분야를 접하기도 좋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어지간해선 만날 수 있고, 들어가보고 싶은 현장도 웬만해선 가볼 수 있다.

필자가 ‘확 때려치고 공부나 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를 이야기하려면, 무려 2년 전인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 해로 말할 것 같으면- 모든 기자가 그렇듯 ‘세월호’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던 해였다. 2008년부터 기자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대한민국의 ‘다이내믹’한 천태만상을 모두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앞에서는 무력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그 해 사회부 기자들은 꽤 많이 성장했고, 생각이라는 것을 더 하게 됐으며, ‘다음’을 생각하게 됐다. 필자의 경우, 그 해에 편집국 사회부에 몸 담았는데, 주말판 담당이라 모든 사건을 심층 취재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었다. 엄청나게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파고들어야 했다. 매 주말마다 ‘아이를 낳는’ 심정으로 토요일밤을 보냈고, 일요일 아침 집 앞에 도착한 신문 뭉치를 펼쳐보며 혹시 오타는 없는지 몹시 조마조마해 했다.

그러던 2014년 여름 어느날,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데이터 저널리즘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고, 열 살 때 배우던 GW-베이직, Q-베이직 같은 코드를 추억하기에 이른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그즈음 내게는 개발자인 친구들이 생겨났고, 코드를 가르치는 소규모 스터디에 가입할 기회도 생겼다. 처음 배운 언어가 루비(RUBY)였는데, 코드카데미(Codecademy)의 예제를 따라하다 암에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내 놔 버렸다. 허나 이미 사내에 “저 친구 요즘 컴퓨터 배운다”는 소문이 났고, 억지로 ‘손코딩’을 해가며 데이터를 수집해 분석하다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니 주말에 나오는 기사 몇 바닥이 다 ‘내 새끼’같을 수밖에. 그러다 2015년, 방송 부문으로 발령이 났고, 워낙 바쁜 일상 속에서 내 것을 쌓지 못한다는 슬픔이 밀려왔다. ‘다 쓴 치약’처럼 손톱 끝으로 내 모든 걸 꾹꾹 밀어내는 느낌이랄까. 그 때쯤 나는 ‘퇴임을 한 선배들은 무슨 일을 하나’를 알아보고 다녔고, 6개월의 취재 끝에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때려친 이유’다.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일은 몹시 재밌었지만, 옮겨 간 부서에서는 그 전에 느끼던 희열을 유지할 수 없었다.
  2. 때마침 ‘미래의 먹거리’로 보이는 학문에 관심을 느끼게 됐고, 실제로 배워봤다. 고통도 느껴봤고, 견딜 만 했다.
  3. 이 직업은, 퇴직 하고 나면 주로 기업 홍보실에 가는구나- 라는 걸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는 홍보 업무가 딱히 끌리지 않았다.
  4. 가족들의 지지도 있었다. 물론 2년치 생활할 만한 돈도. (그때는…)

이 정도의 근거라면 충분히 다음 스텝을 향해 나아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상황도 괜찮았다. 당시 나는 결혼 2년 차. 신랑은 지금도 회사를 관둘 생각이 전혀 없는 (아주 착한)사람이다. 주변의 한 친구는 “나는 아직 결혼을 못 해서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했다. 선 시장에 나갈 때 ‘여기자’라는 직업은 그리 나쁘지 만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나는 모아둔 돈도 몇 천 만원 있었다. (돈 얘기는 아마 다음회쯤에서 털어놓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눈물이…) 무엇보다도 ‘궁금한 그 일, 그 공부’를 제대로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영리하게 선택해라, 리스크도 줄어든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것은, 1년 전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쉬웠다. 개인적으로는 학부 졸업 후 석사 진학보다, 학부 졸업 후 취업 후 석사 진학이 보다 쉬운 것 같다. (첨언하자면, 물론 요즘 같은 취업난에 학부 졸업 후 사회 진출 자체가 어려운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 글은 현재 회사 생활을 하는 이들을 타깃으로 하므로, 상대적인 난이도를 논하기 위해 위와 같이 서술했다.) 선발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학부 졸업생과 사회생활을 한 사람을 같은 선상에서 두고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사회생활을 한 사람은 ‘한 번 필터링이 된’ 인재들이다. 설령 그가 학부시절 전혀 다른 공부를 했고, 직장 생활 또한 희망 전공과 다른 일을 했을 지라도 선발을 맡은 교수들 입장에선 한 번이라도 서류를 더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생활을 한 사람은 같은 조건의 또 다른 사람이 그의 경쟁자가 되는 셈이다.

필자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전혀 다른 전공 베이스의 전혀 다른 일을 하던’ 케이스다. 어떻게 보면 타깃을 꽤 영리하게 선택하기도 했다. 일단 내 배경으로 공과대학에 진학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뻔하게 언론정보학과에 진학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해보지 않았고, 그러느니 그냥 일을 계속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침 대한민국에서는 융합 학문의 바람이 솔솔 불고 있었고, 서울대를 비롯해 유수의 대학에서 융합 관련 학과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필자 입장에선 무조건 ‘융합’을 잡아야 했다.

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단 Y대나 대전 K대의 경우 학비가 몹시 비쌌다. 그나마 대전 K대는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으나, “이 곳에 가면 인문학 베이스는 엄청나게 무시를 당한다”는 뜬금없는 소문을 접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대에서는 ‘수학 못 하는 문과 출신’에 대한 편견이 어딜 가나 있기 때문에 어느 학교나 다 똑같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내 선택은 S대였다.

학부에서 스트레이트로 진학하는 케이스와는 달리 내 경우 연구실 인턴이나 교수님 컨택(Contact) 같은 가장 중요한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만큼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인데, 기자로 일하긴 했어도 온전히 IT업계만 담당을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분야 전문가들과 아주 밀접하게 연이 닿진 않았다. 필자의 지도교수와도 면접 당일에 처음 대면 했을 정도다. 물론 컨택은 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일단 나에게 정말 맞는 연구실인지 알 수 있다.
  2. 교수와의 면담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연구가 무엇인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좁혀 갈 수 있다. 
  3. 장학금, 인건비 등 정보를 얻을 수 있다.
  4. 무엇보다도 합격할 확률이 높다.

영어 공부좀 해라, 안 그럼 세게 덴다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영어점수다. 해외든 국내든 영어 점수는 필수다. 만만하게 봤다간 정말 큰 코 다칠 수 있는데, 필자의 경우 조기 영어교육을 꽤 촘촘히 받은 전력도 있고 해서 ‘뭐 별 일 있겠느냐’는 마음으로 덤벼 들었다가 아주 세게 델 뻔 했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영어 시험을 본 것이 2009년 부근의 토익(TOEIC)이었다. 2015년 3월에 텝스(TEPS)를 신청했는데, 그 전에 같은 시험을 본 것이 아마 2006년 쯤이었을 것이다. 일을 하던 중이었으니 당연히 시험 공부는 전혀 하지도 못 했고, 시험장에 들어가서야 ‘어휘와 문법, 듣기와 독해 시간이 모두 분리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척 어렵다는 것도 깨우쳤다. 하필이면 그 시험이 원서 접수 전 마지막이어서, 점수 나오는 날까지 상당히 조마조마 했더랬다. 다행히 커트라인을 살짝 넘긴, 인생 최악의 점수표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점수는 숫자일 뿐, 실제 실력과는 무방하다는 생각이 계속됐다. 면접장에서 “어학 전공인데, 왜 영어 성적이 이 모양이죠?”라는 말을 들었을 때 “텝스가 정말 어렵더라고요”라며 웃을 수 있던 것도 그 때 뿐. 합격 후 첫 면담 자리에서 지도교수가 “영어 라이팅은 어느 정도 하나요?”라는 말에 “그럭저럭”이라고 말 할 수 있던 것도 어쩌면 그 때 뿐이었을 지도 모른다. 영어에 대한 나의 이 무모한 생각(그리고 착각)이 어떻게 깨지게 되었는 지는 뒤에서 다시 이어가겠다. 

일은 7월 초에 그만 뒀다. 휴가 까지 탈탈 털어 쓴 뒤 기자 생활을 만 5년 꽉 채운 날로 계산해 고른 날짜였다. 플랜B로 나중에 다시 일을 해야할 경우에 대비, 이직 가능 연한은 채워놨다. 지도교수를 만난 것이 7월 말이었고, 그는 “HCI분야에서 가장 큰 학회가 카이(CHI)다. 여기랑 WWW 학회 사이트에 들어가서 논문 다운받아 읽어보라”고 했다. 필자는 마냥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고 싶었을 뿐, 그 분야나 세부 전공에 대한 이해는 몹시 부족했다. 다만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굳이 그 분야를 일백프로 알고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그림이 있다면, 그 그림이 완성돼가는 과정은 어차피 겪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1을 말하면 교수는 10을 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몇 개의 단어 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다.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한 달 동안 두 학회(CHI, WWW)의 2014년 논문(Proceedings) 요지문(abstract)을 모두 읽고 그 가운데 20개를 뽑아 본문을 모두 세세하게 읽고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이런 논문은 모두 유료다. 다만 학교에서 다운받아 볼 경우 라이센스 등록이 돼 있어 무료로 볼 수 있다. 마침 집이 학부 시절을 보낸 학교와 가까이 있어, 졸업생 자격으로 학교 도서관에 가서 논문을 받아 읽었다. 졸업 후 7년 만에 모교 도서관에 간 셈이었다. 정리는 내 방식대로 간단하게 했는데, 이게 추후 내 선행연구(reference) 정리 작업에 꽤 많은 도움이 됐다. 한 페이지 분량으로 요약문, 여기에서 읽고 떠오른 연구 주제(발제), 그리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해 써 내려갔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있었다. 논문은 모두 영어로 써 있다. 더구나 인문학을 하던 사람에게 낯선 용어도 한 둘이 아니었다. 아니, 일단 대학원에서 쓰는 용어가 모두 생소하다. 교수님과 면담을 할 때도 느낀 것이지만 그가 쓰는 영어 용어들을 알아 듣기가 그리 수월하지 만은 않았다. 그간 기자로서 많은 교수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지만, 그들은 늘 쉬운 용어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줬다. 자신의 학생이 아닌, ‘잘 모르는’ 기자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쪽 ‘업계’에 들어온 이상 이 분야 용어에 빠르게 익숙해져야 했다. 논문도 마찬가지다. 모든 말을 쉽게 풀어 써 준 외신 뉴스와 달리, 논문은 자신들의 논리를 꼭 단순하고 명료하게 풀어나가지 만은 않는다. 그걸 ‘못 쓴 논문’이라고 폄훼할 수만은 없다. 모든 글은 친절하지 않다. 그냥 죽어라고 읽고, 파는 수 밖에 없다. 후에 또 언급하겠지만, 내가 직접 논문을 쓰는 순간이 왔을 때 ‘그 글들 만큼’이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영어로 읽는 것이 조금 편해진 것은 6개월 파고 들었을 무렵이었다. 그나마도 스크린에 띄우고 보는 것은 알파벳이 영 헷갈려서, 모두 인쇄해 밑줄을 그어가며 종이째 읽어야 편하다.